'사케'를 담은 붉은 잔… 야쿠자의 미식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2026-10-19 15:00:27

'오미키(신의 술)' 8대 2로 나누어 마시며 절대적인 '부모와 자식' 맹세

[Cook&Chef = 이승우 기자] 일본 뒷골목을 지배하는 범죄 조직, '야쿠자(ヤクザ)'에게는 '사카즈키오 카와스(杯を交わす)'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잔을 나누다'라는 뜻으로, 남남이었던 두 사람이 '부모와 자식(오야분-코분)' 혹은 '형제(교다이)'로 거듭나며 충성과 의리를 맹세하는 절대적인 결연 의식(사카즈키고토·盃事)을 의미한다.

이 행위를 통해 이들은 친부모를 버리고 조직의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운명으로 단단히 묶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토록 무겁고 잔혹한 맹세를 다짐할 때, 그들은 주로 어떤 술을 마시고 어떤 안주를 곁들일까? 역설적이게도 어둠의 세계를 지탱하는 이 의식은 일본에서 가장 성스럽고 전통적인 식재료와 기물들로 채워진다.

신의 술 '오미키', 사무라이의 명주 '켄비시(剣菱)'의 선택

이 의식을 완성하는 핵심은 맑은 청주, '오미키(御神酒)'다. 신토(神道) 의식에서 신에게 바쳤다 물린 성스러운 술로, 서로의 피를 대신하는 매개체다.

아무 술이나 제단에 올리지 않는다. 특히 서일본의 거대 조직들이 본거지로 삼는 고베 등지에서는 '켄비시(剣菱)'나 '쇼치쿠바이(松竹梅)' 같은 유서 깊은 브랜드의 최고급 청주가 단골로 쓰인다. '송죽매'를 뜻하는 쇼치쿠바이가 최고의 길조와 축하를 상징한다면, 500년 역사의 고베산 청주 '켄비시'는 '사내들의 술'이라는 묵직한 상징성을 지닌다. 과거 사무라이들이 출전 전 결의를 다질 때나 낭인들이 거사 직전 마셨던 술이 바로 켄비시다. 피 튀기는 복수와 충성을 맹세하는 야쿠자의 식탁에 이보다 완벽한 명분은 없다.

이 명주를 따를 때도 엄격한 '미식의 위계'가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의 연을 맺을 때는 보스(오야분)의 잔에 술을 8할, 부하의 잔에 2할을 채운다. 부하가 먼저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운 뒤 보스의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켭니다. 보스의 피가 섞인 술을 온전히 받아들여 한 몸이 되었다는 섬뜩한 퍼포먼스다.

계약서가 된 붉은 옻칠 잔과 3대 안주

술을 담는 기물은 최고급 장인이 빚어낸 '붉은 옻칠(우루시) 사카즈키'다. 잔의 중앙에는 조직의 가문(문양)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의식을 마친 부하는 이 잔을 백지에 소중히 싸서 평생 자신의 신단에 모셔두며, 훗날 파문당할 때 비로소 이 잔을 반납하거나 깨뜨리며 생명을 다하게 된다.

술과 잔을 뒷받침하는 안주역시 철저히 길조를 상징하는 식재료로 구성된다. 제단 중앙에는 '경사'를 뜻하는 붉은 '도미 구이'가 온전한 형태로 오르고, 씹을수록 맛이 나는 '마른오징어(스루메)'로 끈끈한 결속을, '다시마(곤부)'로 가문의 번영을 기원한다. 오늘날 이 거창한 의식은 정부의 단속에 밀려 조직 사무실 구석에서 종이컵과 수돗물로 대체되는 촌극을 빚고 있지만, 가장 불법적인 조직이 정통 식문화의 상징성을 빌려 세력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가을밤, 영화 '아웃레이지'의 주인공처럼

찬 바람이 부는 가을엔 왠지 모르게 감성에 젖을 때가 많다. 물론 우리는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평범한 시민들이지만, 올가을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혹은 가까운 선술집에 들른다면 묵직한 '켄비시' 청주 한 병과 질 좋은 마른오징어 안주를 주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결의를 다지듯 사카즈키(술잔)를 나누며, 영화 '아웃레이지' 속 기타노 다케시가 된 듯한 기분을 잠시나마 만끽해 보는 것. 이는 미식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꽤나 짜릿하고 낭만적인 가을밤의 일탈이 될 것이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참고 문헌 및 출처]

일본 경시청(경찰청): 《조직범죄 대책 백서》 및 폭력단 대책법·배제 조례 관련 법무성 공식 자료

전통 식문화 및 종교 사료: 일본 신토(神道)의 '신센(神饌·신에게 바치는 음식)' 문화 및 일본 전통 혼례(산산쿠도) 관련 역사 문헌

주조(酒造) 역사 기록: 효고현 고베시 나다(灘) 지역 주조 향토사, '켄비시(剣菱)' 주조의 공식 연혁 및 '추신구라(아코 사건)' 역사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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