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균의 ‘역사 속 음식이야기’] (6) 술의 경지

염상균 칼럼니스트

cnc02@hnf.or.kr | 2026-09-16 15:00:11

‘승무’시인 조지훈의 ‘주도유단’ 18단계로 구분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이면 7단의 ‘낙주’
조지훈 시인의 시비  사진 = 염상균 칼럼니스트

[Cook&Chef = 염상균 칼럼니스트]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은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국문학자다.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펴내며 청록파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고, 전통의 아름다움과 우리 정서를 맑고 깊은 언어로 노래했다.

대표작 「승무」는 장삼을 입은 여승의 춤을 바라보며 인간의 번뇌와 초월의 세계를 그린 시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고요한 절집의 풍경과 춤의 움직임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준다. 조지훈의 「승무」는 열아홉 살 가을, 수원 근교 용주사에서 본 승려의 춤에 깊이 빠져든 것이 시작이었다.

재가 끝난 뒤에도 밤늦도록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 넋을 잃고 서 있을 만큼 강렬한 감동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늦봄까지 붓을 들지 못했다. 그러다 스무 살 첫여름, 비로소 그날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시로 옮기기 시작했다. 1939년 『문장』에 발표된 「승무」는 그렇게 용주사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나왔다.

조지훈은 술을 즐기고 술의 풍류를 이해했던 시인이자 술을 통해 사람의 품격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쓴 「주도유단(酒道有段)」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시느냐가 아니라 술을 어떻게 대하고 즐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주격(酒格)’을 바둑의 급수와 단수처럼 나눈 글이다.

그 스스로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酒道)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술자리의 풍류와 인간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바라본 ‘술의 인물평’이랄까.

음주 9급에서 9단까지

조지훈은 음주 세계를 9급에서 9단까지 모두 열여덟 단계로 나누었다. 9급은 부주(不酒)다. 술을 마실 줄 알면서도 마시지 않는 사람이다. 8급 외주(畏酒)는 술을 마시면서도 술을 두려워하고, 7급 민주(憫酒)는 술을 마시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긴다. 6급 은주(隱酒)는 술을 좋아하면서 형편 때문에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이다.

5급 상주(商酒)는 이속(利)을 얻을 때 술을 내는 사람이고, 4급 색주(色酒)는 이성을 위해 술을 마신다. 3급 수주(睡酒)는 잠을 이루기 위해 술을 마시며, 2급 반주(飯酒)는 밥맛을 돋우려고 술을 곁들인다. 이들은 모두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아직 술 자체의 진경과 진미를 깨닫지 못한 단계다.

1급에 이르면 학주(學酒)가 된다. 술의 진경을 배우는 사람으로, 조지훈은 그를 주졸(酒卒)이라 부른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주도의 세계가 열린다. 초단은 애주(愛酒),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이다. 2단 기주(嗜酒)는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으로 주객(酒客)이라 하고, 3단 탐주(耽酒)는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으로 주호(酒豪)라 한다.

4단 폭주(暴酒)는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으로 주광(酒狂)이다. 5단 장주(長酒)는 주도삼매(酒道三昧)에 든 사람으로 주선(酒仙)이라 한다. 여기까지 오면 술은 단순한 음식이나 기호품이 아니라 삶의 풍류가 된다.

그런데 높은 단수로 갈수록 더 많이 마시는 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6단 석주(惜酒)는 술을 아끼고 인정(人情)을 아끼는 사람으로 주현(酒賢)이다. 좋은 술만큼 함께 마시는 사람의 정을 귀하게 여긴다. 7단 낙주(樂酒)는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성(酒聖)이라 한다.

8단 관주(觀酒)에 이르면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이다. 술잔을 들지 않아도 술자리의 정취와 지난날의 기억만으로 즐거움을 얻는다. 마지막 9단은 폐주(廢酒), 또는 열반주(涅槃酒)다.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의 세상으로 떠난 사람이라는 뜻이니, 조지훈다운 해학이 절정에 이르는 대목이다.

급수와 단수라는 익살스러운 틀

술도 음식이다. 밥이 배를 채우는 음식이라면 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음식이다. 술 한 잔에는 빚은 사람의 정성과 시간이 들어가고, 그 술을 마시는 자리에는 사람의 성품과 사연이 따라붙는다. 조지훈은 바로 그 점을 ‘급수’와 ‘단수’라는 익살스러운 틀에 담아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몇 단쯤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술잔을 마주하면 마시는 것 자체가 즐거웠고, 술자리의 흥과 사람의 정을 찾아 이곳저곳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술의 양보다 술자리의 기억이 더 소중하다. 마셔도 좋고, 마시지 않아도 좋다. 좋은 사람과 술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한잔을 마신 듯 즐겁다.

이제 다음 주면 추석 연휴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친구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나눌 때다. 이참에 조지훈의 「주도유단」에 비추어 자신의 주도를 한번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지금의 나는 과연 몇 급이며 몇 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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