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원짜리 서민 음식이 된 소고기 '규동'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2026-10-20 15:01:06
[Cook&Chef = 이승우 기자]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소고기가 아무리 싼값에 유통된다 한들, 대중의 한 끼를 책임지는 최전선의 '서민 음식'이 되기란 쉽지 않다고 여겨진다. 단가가 훨씬 저렴하고 접근성도 좋은 돼지고기나 닭고기 등 훌륭한 대체재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웃 나라 일본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고기가 수북하게 얹어진 '규동(牛丼·소고기 덮밥)'이 그들의 가장 친숙하고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꼽힌다. 비싼 식재료의 대명사인 소고기가 어떻게 단돈 400엔(약 4천 원) 안팎의 경이로운 가격표를 달고 국민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참으로 특이하고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이 압도적인 가성비 뒤에 숨겨진 규동의 진짜 뒷이야기를 파헤쳐 보자.
수입산 '쇼트 플레이트'와 3대 체인의 규모의 경제
규동의 극단적인 가성비는 '부위의 재발견'과 '규모의 경제'라는 두 축으로 완성된다. 요시노야, 스키야, 마츠야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형 규동 체인점들은 주로 미국이나 호주에서 수입한 소고기를 사용한다.
그중에서도 규동에 쓰이는 핵심 부위는 '쇼트 플레이트(Short plate)', 즉 우리의 우삼겹(양지) 부위다. 지방 비율이 30-40%에 달해 구이용이나 스테이크용으로는 인기가 없어 단가가 저렴하지만,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간장 베이스의 육수에 끓여내면 상황이 달라진다. 풍부한 지방이 육수에 녹아들어 압도적인 감칠맛을 내고, 고기는 입에서 녹을 듯 부드러워진다. 여기에 수천 개의 매장을 둔 대형 프랜차이즈들의 막강한 글로벌 구매력과 100% 자동화된 센트럴 키친 시스템이 더해지면서 고단백의 소고기 덮밥 단가를 극한으로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서양식 전골 '규나베'에서 노동자의 덮밥 '규동'으로
이처럼 완벽한 패스트푸드로 자리 잡은 규동의 기원은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육식 금지령이 해제되면서, 소고기를 간장과 설탕에 졸여 먹는 전골 요리인 '규나베(牛鍋)'가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크게 유행했다.
하지만 바쁜 노동자들에게 불을 피우고 여유롭게 먹어야 하는 규나베는 사치였다. 1899년, 도쿄 니혼바시 어시장의 상인들을 상대로 문을 연 '요시노야(吉野家)'가 남은 규나베 국물과 고기를 밥 위에 듬뿍 얹어 '붓카케(부어 먹는)' 스타일로 내놓은 것이 규동의 시초가 되었다. 젓가락으로 밥을 후루룩 마시듯 재빨리 먹고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고안된 철저한 '노동자의 음식'이었던 셈이다.
초기 규동 vs 현재의 규동 : 효율성을 위한 과감한 덜어내기
초기 형태의 규동(당시 명칭은 규메시)은 규나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고기 외에도 구운 두부(야키도후), 실곤약, 두꺼운 대파 등이 함께 올라가 마치 '스끼야끼 덮밥'에 가까운 형태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규동에는 고기와 얇게 썬 양파(다마네기), 단 두 가지만 들어간다. 이는 매장을 프랜차이즈화하는 과정에서 '조리 시간 단축'과 '원가 절감'을 위해 효율이 떨어지는 재료들을 과감히 쳐낸 결과다. 특히 파 대신 수분이 많고 단맛이 강한 양파를 채택함으로써, 끓일수록 자연스러운 단맛이 우러나오게 만든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대중성을 넘어선 특별한 한 그릇, 고베 '히로시게'
요시노야, 마츠야, 스키야 등 3대 대형 체인점의 규동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현지에서 흔하게, 그리고 즐겨 찾는 메뉴일 것이다. 만약 평소에 자주 먹는 뻔한 가성비 규동에서 벗어나, 최고급 이색 규동을 맛보고 싶다면 효고현 고베시 기타노자카에 위치한 '고베규동 히로시게(神戸牛丼 広重)'를 추천한다.
이곳의 단일 메뉴인 '고베 규동'은 대중 체인점의 수입산 소고기 대신 일본 최고급 소고기로 꼽히는 A5 랭크의 '고베규' 양지 부위만을 듬뿍 사용한다. 특제 간장과 양파에 졸여낸 고베규에 신선한 날계란과 은은한 시소(일본 깻잎), 꽈리고추를 곁들인 이 한 그릇(약 2,000엔대)은, 우리에게 익숙한 규동이 최고급 식재료를 만났을 때 어떤 훌륭한 요리로 변신할 수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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