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안전망의 두 축: 경남과 대구의 사례
제조리 기자
cnc02@hnf.or.kr | 2025-12-09 23:58:08
[Cook&Chef = 제조리 기자] 주방의 뜨거운 열기는 생명을 유지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치열한 현장이다. 펄펄 끓는 육수 솥 옆에서는 한겨울에도 땀방울이 흐르고, 쉴 새 없이 울리는 오더 프린터 소리는 전쟁터의 교신처럼 긴박하다. 이 모든 과정은 단 하나, ‘안전하고 맛있는 음식’을 손님에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화려한 다이닝 레스토랑의 접시 너머, 우리 사회에는 이 기본적인 전제조차 위협받는 이들이 공존한다.
한쪽에서는 갑작스러운 생계 위기로 당장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이웃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백 명의 식사를 책임지는 단체급식소의 보이지 않는 위생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두 가지 풍경은 사실 ‘먹거리’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과연 모두에게 안전하고 존엄한 한 끼를 보장하고 있는가.
최근 경상남도가 시작한 ‘그냥드림 시범사업’과 대구시가 나선 ‘동절기 식중독 합동점검’은 이 질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두 가지 대답을 보여준다. 경남의 정책이 ‘먹거리 접근권’이라는 사회적 안전망의 가장 낮은 문턱을 만드는 시도라면, 대구의 정책은 ‘식품 안전성’이라는 공중 보건의 방패를 더욱 견고히 하는 노력이다. 이는 단순한 지방자치단체의 개별 정책을 넘어, 외식 산업 종사자와 소비자 모두가 주목해야 할 지속 가능한 식문화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위기의 문턱을 낮추다: ‘그냥드림’의 사회적 함의경상남도가 12월부터 김해시푸드마켓에서 시작한 ‘먹거리 기본보장(그냥드림) 시범사업’은 그 이름만큼이나 파격적이다. 갑작스러운 위기에 처한 도민이라면 별도의 서류 심사 없이 신분증만으로 2만 원 상당의 식료품 꾸러미를 받을 수 있다. 조건 없는 지원. 이는 단순한 물품 전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주방에서 일하다 보면 다양한 손님을 만난다. 때로는 값비싼 코스 요리를 주문하는 손님 옆 테이블에서, 단품 메뉴 하나를 두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때로는 위로가 되고 관계의 매개가 된다. 하지만 생계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 외식은 사치이며, 마트에서 식재료를 고르는 일상조차 버거운 현실이 된다.
‘그냥드림’ 사업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복잡한 서류와 자격 심사라는 높은 문턱을 과감히 없앴다. 이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주고,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 없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한 설계다. 꾸러미는 쌀, 라면, 통조림 등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3~5개 품목으로 구성된다. 이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더 주목할 부분은 이 사업이 일회성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 방문은 조건 없이 지원하지만, 두 번째 방문부터는 자연스럽게 복지 상담으로 이어진다. 이는 ‘먹거리’를 매개로 숨어있는 위기 가구를 발굴하고, 긴급복지나 기초생활보장 같은 공공 서비스와 연결하는 ‘복지 시스템의 진입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김영선 경남도 복지여성국장이 “도민 누구도 식생활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기본권 보장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배경이다.
보이지 않는 위험과의 전쟁: 급식 현장의 위생 관리한편, 대구시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이곳의 주방은 온정보다는 긴장감이 감돈다. 대구시는 내년 2월 말까지 80일간 병원, 산업체 등 지역 내 집단급식시설 709곳을 대상으로 동절기 식중독 합동점검에 나섰다. 주된 타깃은 겨울철 식중독의 주범인 ‘노로바이러스’다.
노로바이러스는 영하 20도에서도 생존할 만큼 끈질기고, 단 10개의 입자만으로도 감염을 일으킬 정도로 전염력이 막강하다. 특히 수백, 수천 명의 식사를 동시에 준비하는 집단급식소에서 한 번 발생하면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조리 종사자의 손, 오염된 식재료, 심지어는 지하수까지 모든 것이 감염 경로가 될 수 있다.
대구시의 점검은 주방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을 겨냥한다. 소비기한이 지난 제품을 사용하는지, 부패하거나 변질된 원료를 쓰는지, 식재료 취급 과정은 위생적인지 등을 샅샅이 살핀다. 이는 셰프가 자신의 주방에서 매일같이 확인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식재료의 신선도는 맛의 시작이자 끝이며, 교차 오염 방지를 위해 도마와 칼을 구분하는 것은 조리사의 제1수칙이다.
점검 항목은 디테일하다. 조리 종사자의 건강진단 이행 여부, 지하수 사용 업소의 정기적인 수질 검사 여부까지 포함된다. 이는 식중독 발생의 잠재적 요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지난해 점검에서 보존식 미보관, 소비기한 경과 제품 보관 등 4건의 위반사항이 적발되어 행정처분이 내려진 사례는, 이러한 점검이 결코 형식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접근권과 안전성: 동전의 양면경남의 ‘그냥드림’과 대구의 ‘위생 점검’은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정책이다. 하나는 복지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보건의 영역이다. 하지만 두 정책은 ‘지속 가능한 먹거리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먹거리 지원이 양(Quantity)의 문제라면, 위생 관리는 질(Quality)의 문제이며,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만약 ‘그냥드림’ 사업을 통해 지원되는 기부식품의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하거나 보관 상태가 불량하다면 어떻게 될까. 선의로 시작된 지원이 오히려 수혜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푸드뱅크나 푸드마켓에 기부되는 식료품 역시 철저한 위생 관리와 유통기한 준수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다. 즉, ‘접근권’의 확대는 ‘안전성’ 확보라는 책임과 함께 가야 한다.
반대로, 아무리 위생적으로 완벽한 급식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한들,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굶주리는 이가 있다면 그 시스템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대구시가 점검하는 709곳의 급식시설은 병원 환자, 공장 근로자 등 특정 집단에게 안정적인 식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그 자체로 거대한 복지 시스템의 일부다. 이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것이 바로 경남의 ‘그냥드림’과 같은 정책의 역할이다.
결국 두 정책은 우리 사회가 먹거리를 대하는 태도의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하나는 ‘인권’으로서의 먹거리, 다른 하나는 ‘공중 보건’으로서의 먹거리다. 이 두 가치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건강한 식문화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릴 수 있다.
외식 산업에 던지는 시사점이러한 지자체의 노력은 외식 산업 현장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첫째,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이다. 레스토랑은 단순히 음식을 파는 공간을 넘어 지역 사회의 일원이다. 남는 음식을 기부하거나,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냥드림’ 사업은 이러한 민간의 선의를 공공 시스템과 연결하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둘째, 위생 관리의 재점검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소비자들의 위생 민감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대구시의 점검 항목들은 모든 외식업장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 목록과 같다. 우리 주방의 식재료 관리는 완벽한가? 조리 종사자들의 개인위생에는 문제가 없는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청결을 유지하고 있는가? 고객의 신뢰는 바로 이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에서 시작된다.
노권율 대구시 위생정책과장이 “시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급식 환경 조성에 힘쓰겠다”고 말한 것처럼, 모든 셰프와 외식업 경영자는 ‘고객이 안심할 수 있는 주방 환경’을 조성할 책임이 있다. 이는 법적 의무를 넘어 고객과의 가장 중요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하여먹거리 문제는 이제 특정 계층이나 지역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의제가 되었다. 경남의 시범사업이 내년부터 9개 시·군으로 확대될 계획이라는 점은 이러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기도에서 시작된 유사 모델이 경남으로 확산되고, 보건복지부가 2026년 신규 사업으로 도입을 검토하는 흐름은 긍정적인 신호다.
대구시의 정기적인 위생 점검 역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동절기마다 반복되는 시스템으로 정착했다. 이는 문제가 발생한 뒤 수습하는 ‘사후약방문’이 아닌,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는 ‘예방적 관리’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는 경남의 ‘온정’과 대구의 ‘엄격함’을 모두 아우르는 통합적인 먹거리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기부된 식료품이 생산-유통-보관-전달의 모든 과정에서 위생적으로 관리되는 시스템, 그리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단순히 음식을 제공받는 것을 넘어 건강한 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한 명의 셰프 출신 기자로서, 그리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꿈꾸는 진정한 의미의 ‘미식 사회’다. 뜨거운 주방에서 만들어지는 한 접시의 요리가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안전한 에너지가 되는 세상. 그 길은 먹거리를 권리이자 책임으로 인식하는 우리 모두의 노력에서 시작된다.
Cook&Chef / 제조리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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