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긴 밤, 붉은 팥죽으로 새해의 서광(曙光)을 부르다

서현민 기자

cnc02@hnf.or.kr | 2025-12-18 19:12:53

동지, 어둠을 밀어내는 붉은 양기(陽氣)의 날
동지의 기원과 어원, 그리고 팥죽에 담긴 주술과 소망의 민속 문화


밤이 가장 긴 동지, 한 해의 액운을 막아 달라는 염원을 담아 먹는 동지 팥죽을 먹었다. [사진=한국민속대백과사전]


[Cook&Chef = 서현민 기자] 오는 12월 22일 월요일(양력), 절기상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가 찾아온다.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인 동지는 단순한 계절의 지표를 넘어, 오랜 역사 속에서 풍요를 기원하고 액운을 막는 중요한 민속 의례의 날로 자리 잡아 왔다. 특히 팥죽을 나눠 먹는 풍습은 동지의 상징과도 같은데, 그 안에는 깊은 철학과 공동체의 소망이 서려 있다.

태양이 다시 태어나는 날, ‘아세(亞歲)’ 동지는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아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천문학적으로는 태양이 황도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는 동지점(冬至點)을 통과하는 때를 말한다. 고대인들은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태양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날’ 혹은 ‘빛의 회복’으로 여겼다.

이러한 인식은 고대 중국 당나라 시대부터 전해졌으며, 조선시대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에 따르면 우리 선조들은 동지를 ‘아세(亞歲)’, 즉 ‘작은 설’이라 부르며 설 다음 가는 큰 명절로 대접했다. “동지를 지나야 비로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속담 역시 동지를 실질적인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던 문화적 유산이다.

동지 아침, 장독대 위로 조심스레 뿌려지는 팥죽 한 국자. 붉은 기운으로 액운을 막고,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던 조상의 지혜가 손끝에 배어 있다. [사진=한국민속대백과사전]

동지팥죽의 유래

역귀를 쫓는 붉은 주술 동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단연 팥죽이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은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기록된 설화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옛날 ‘공공씨(共工氏)’라는 사람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귀(疫鬼,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가 되었는데, 그 아들이 살아생전 팥을 몹시 무서워했기에 사람들이 역귀를 쫓기 위해 동짓날 팥죽을 쑤어 대문과 벽에 뿌렸다는 기록이다.

조선 후기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도 “동짓날에는 집집마다 팥죽을 쑤어 문지방과 벽에 뿌려 귀신을 쫓는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팥의 붉은색은 벽사(辟邪, 사악한 것을 물리침)의 색으로, 양(陽)의 기운을 상징한다. 음기가 극에 달한 동짓날, 붉은 팥죽을 통해 음적인 존재인 귀신과 병마를 제압하려 했던 도교 및 민간 신앙의 결합인 셈이다.

올해는 ‘애동지’, 팥죽 대신 팥시루떡? 흥미로운 점은 매년 동지에 무조건 팥죽을 먹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동지는 음력 날짜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애동지: 음력 11월 초순(10일 이전)에 드는 동지. 아이에게 해롭다 여겨 팥죽 대신 팥시루떡을 먹는다. 중동지: 음력 11월 중순(10일~20일 사이)에 드는 동지.  노동지: 음력 11월 하순(20일 이후)에 드는 동지.팥죽을 쑤어 먹는다. 아이를 위한 동지, 애동지.
팥죽 대신 시루떡 한 판에 붉은 기운과 무탈한 새해를 빌었다. [사진=한국의맛연구회]

올해(2025년) 동지는 음력 11월 2일로 ‘애동지’에 해당한다. 민속학적 전통에 따르면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팥죽 대신 붉은 팥시루떡을 준비해 가족의 안녕을 비는 것이 관례다.

과학과 민속의 만남

팥의 영양학적 가치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팥에는 항산화 성분인 폴리페놀과 사포닌이 풍부하여 겨울철 면역력 저하를 막는 데 탁월하다. 또한 비타민 B1이 풍부해 피로 해소에 도움을 주며, 칼륨 성분은 체내 부기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다. 또한, 팥의 강력한 항산화 기능은 현대인의 만성 질환 예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눔과 연대의 문화, 동지 동지팥죽(혹은 팥떡)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공동체적 연대의 표현이었다. 이웃과 음식을 나누며 한 해의 액운을 함께 씻어내고, 새알심을 가족의 나이 수대로 넣어 나누어 먹으며 장수와 복을 기원했다.

동지는 단순히 밤이 긴 날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의 씨앗을 발견하는 시기다. 붉은 팥의 기운을 빌려 묵은 액운을 털어내고,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다가올 새해를 준비했던 선조들의 마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가오는 동지, 팥죽 한 그릇 혹은 팥떡 한 조각에 가족의 건강과 새로운 시작의 설렘을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Cook&Chef / 서현민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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