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나물 식문화와 포만감의 과학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2-19 23:56:06

조선시대 기록 속 나물 상차림과 식이섬유가 만드는 장의 반응 [사진=마켓컬리 / 나물]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명절 상차림에서 나물은 늘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 취나물, 토란대처럼 종류는 달라도, 여러 가지 나물이 함께 올라오는 풍경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이 상차림은 단순한 계절 음식의 전통이 아니라, 조선시대 식생활 기록 속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되는 식사의 한 구조였다.

『음식디미방』과 『규합총서』, 『시의전서』 같은 고조리서를 보면 나물 조리법이 매우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말린 나물을 불리고 삶아 무치는 방법, 간을 약하게 맞추는 법, 참기름이나 장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나물이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상차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생활서인 『규합총서』에는 계절에 따라 나물을 채취하고 말려 저장하는 법이 상세히 적혀 있다. 봄과 여름에 채취한 나물을 말려 두었다가 겨울과 이듬해 봄까지 먹는다는 기록은, 나물이 사계절 식단을 이어주는 중요한 식재료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사리, 도라지, 토란대 같은 재료는 말려 두었다가 명절과 제사 때 꺼내 쓰는 대표적인 나물로 언급된다.

『시의전서』에서도 나물류는 상차림의 기본 반찬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나물 조리법이 대부분 ‘부드럽게 삶아 오래 씹지 않아도 되게 하되, 질감은 살아 있게 하라’는 흐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조리 기술이 아니라, 식사의 흐름을 고려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드럽지만 쉽게 삼켜지지는 않는 식감은 식사 시간을 자연스럽게 늘린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보면 나물은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 저장과 계절 순환 속에서 식단을 구성하는 중심 재료였다. 특히 명절 상차림에서 여러 가지 나물이 함께 올라오는 구조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식사 방식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으로 보면 이 나물 상차림은 매우 독특한 식사 구조를 만든다. 나물의 가장 큰 특징은 식이섬유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특히 말린 나물은 수분이 빠져 있는 상태라 섬유질의 밀도가 높다. 물에 불려 조리하면 부피는 커지지만 열량은 높지 않다. 적은 양으로도 위 안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커지고, 자연스럽게 포만감이 형성된다.

[사진=이랜드월드]

식이섬유는 소장에서 거의 흡수되지 않고 대장까지 내려간다. 이 과정에서 장내 미생물의 먹이가 되고, 발효되면서 다양한 대사물질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물질은 장의 움직임을 촉진하고, 음식이 위에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들어 식후 포만감이 오래 이어지도록 돕는다.

특히 고사리와 도라지, 토란대처럼 섬유질이 많은 나물은 씹는 시간이 길다. 이 과정 자체가 포만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음식을 오래 씹을수록 위장으로 전달되는 신호가 늘어나고, 몸이 배부름을 인식하는 시간이 충분히 확보된다. 여러 종류의 나물을 번갈아 먹는 명절 식사는 이러한 과정을 더욱 길게 만든다.

영양학적으로도 나물은 흥미로운 특징을 갖는다. 나물에 포함된 식이섬유는 단순히 장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혈당 상승 속도를 완만하게 만드는 데도 관여한다. 밥과 함께 나물을 먹으면 탄수화물이 흡수되는 속도가 느려지고, 식후에 허기가 빨리 찾아오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나물은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면서도 열량이 낮다. 특히 철분과 칼슘, 항산화 성분이 많은 산나물류는 기름진 음식이 많은 명절 상차림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고기와 전이 중심이 되는 식사에서 나물이 함께 올라오는 구조는 단순한 색의 조화가 아니라 영양의 균형을 맞추는 장치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기록 속에서 나물은 ‘많이 먹어 배를 채우는 음식’이라기보다 ‘식사를 이어가게 만드는 음식’에 가까웠다. 여러 종류를 조금씩 먹으며 밥과 국을 곁들이는 식사 방식은 자연스럽게 식사의 속도를 늦추고, 몸이 배부름을 인식할 시간을 만들어준다.

명절 상차림은 이 구조가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평소보다 더 많은 종류의 나물이 한자리에 모이고, 각각의 향과 식감이 달라 한 가지 음식만 계속 먹기 어렵다. 자연스럽게 여러 반찬을 오가며 식사를 이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포만감은 천천히 올라온다.

이런 흐름은 단순한 전통의 반복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축적된 식생활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구조로 볼 수 있다. 나물을 충분히 먹으면 속이 편안하고, 식사가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는다는 감각은 과학적 언어가 없던 시절에도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명절 음식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이 균형이 깨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과 고기 요리는 늘어났지만, 나물은 점점 간소해지고 종류도 줄어들었다. 식사의 흐름이 달라지면서 포만감이 형성되는 방식도 바뀌었다.

조선시대 문헌 속 나물 기록은 단순한 조리법의 나열이 아니라, 식사를 어떻게 구성해왔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여러 가지 나물을 함께 먹는 구조는 몸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포만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고, 그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져 명절 상차림 속에 남아 있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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