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아래 잠긴 무, 동치미로 겨울을 마시다
이지헌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1-17 16:24:50
[Cook&Chef = 이지헌 전문기자] 초겨울, 입김이 허공에 얇게 맺히는 시기면 장독대의 항아리는 조용해진다. 무를 가르고 물을 붓고, 소금을 푼 뒤, 그 위에 뚜껑을 덮는다. 불도 연기도 없는 이 음식은 기다림으로 완성된다. 동치미는 끓이지 않는 겨울의 국물이다. 차가움 속에서만 맛이 깊어지는, 계절을 마시는 음식의 이야기다.
동치미 이전의 이름, 침채(沈菜)와 동침(冬沈)
동치미의 가장 오래된 모습은 ‘동치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15세기 조선 전기의 식생활서 『산가요록』에는 침채(沈菜)라는 항목이 기록되어 있다. 침채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가 가라앉힌 뒤 서늘한 곳에 두어 오래 저장하는 방법을 뜻한다. 기록에는 무와 같은 채소를 항아리에 담고 소금물을 부어 잠기게 한 뒤, 겨울까지 두고 먹는 법이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는 고춧가루도, 젓갈도 없다. 채소를 물속에 잠기게 두는 방식 자체가 핵심이다. 이 기록에서 침채는 계절을 넘기기 위한 저장 방식에 가까우며, 동치미는 이 침채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된다.
이후 세시풍속서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1월조에는 작은 무 뿌리로 담근 김치를 동침(冬沈)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겨울에 담가 가라앉힌 김치’라는 뜻으로, 주로 겨울에 먹는 물김치를 가리킨다. 일부 문헌에서는 동침저(凍沈菹)라는 표현도 확인되는데, 겨울에 담근 김치이자 겨울에 국물이 언 김치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동치미라는 이름은 동침이라는 한자어가 소리로 변해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동치미는 특정 조리법 이전에 먼저 계절에 속한 김치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치미, 비로소 이름을 얻다
조선시대에 동치미라는 이름이 명확히 등장하는 문헌으로는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규합총서(閨閤叢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이 있다. 그중 『규합총서(閨閤叢書)』는 동치미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잘고 모양 예쁜 무를 꼬리째 정하게 깎아 간 맞추어 절인다. 하루 지나 다 절거든 정하게 씻어 독을 묻고 넣는다. 어린 외를 가지째 재에 묻는 법으로 두면 갓 딴 듯하니 무를 절일 때 같이 절였다가 넣고, 좋은 배와 유자를 왼쪽 방향으로 껍질을 벗겨 썰지 말고 넣고, 파 흰 뿌리 부분을 한 치 길이씩 베어 위를 반씩 잘라 넷으로 쪼갠 것과 생강을 넓고 얇게 저민 것과 고추씨 없이 반듯하게 썬 것을 위에 많이 넣는다. 좋은 물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고운 체에 밭쳐 가득히 붓고 두껍게 봉하여 둔다.”
이 기록에서 동치미는 단순한 김치가 아니라, 국물의 맑음과 저장성을 중심으로 한 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동치미에서 국물이 남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겨울에 익은 후 먹을 때 배와 유자는 썰고, 그 국에 꿀을 타고 석류에 잣을 흩어 쓰면 맑고 산뜻하며, 그 맛이 매우 좋고, 또 좋은 꿩고기를 백숙으로 고아서 그 국의 기름기를 없애고 얼음을 같이 채워 동치미 국에 붓고, 꿩고기 살을 섞어 쓰면 그 이름이 이른바 생치김치이며, 동치미국에 가는 국수를 넣고 무, 오이, 배, 유자를 같이 저며 얹고, 돼지고기와 계란 부친 것을 채 쳐서 흩고 후추와 잣을 뿌리면 이른바 냉면이다.”
동치미 국물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음식의 바탕이 된다. 국물은 동치미이 부산물이 아니라 중심이었다.
겨울에 마시던 가장 오래된 소화제
동치미가 천연 소화제로 불린 이유는 막연한 속설만은 아니었다.
동치미 국물에는 발효 과정에서 생성된 유기산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은은한 산미는 입안을 씻어내고 기름진 음식을 먹은 뒤 둔해진 소화 환경을 다시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동치미는 제사나 잔칫날처럼 육류와 기름진 음식이 많은 자리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왔다.
또한 무는 예로부터 소화를 돕는 채소로 알려져 있다. 무에는 소화를 촉진 시키는 디아스타제와 같은 효소가 들어 있어 음식물 분해에 관여하며, 섬유소질 또한 풍부하다.
여기에 차가운 온도와 발효가 더해지며, 동치미 국물은 열로 달아오른 속을 가라앉히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이 모든 이유로 동치미는 과하게 쌓인 것을 비워내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치미 만드는 방법
무는 껍질째 깨끗이 씻어 적당한 크기로 썬다. 썬 무와 소금을 섞은 후 김치 통에 담아 하루 이틀 절인다.(절이는 동안 나온 물은 버리지 않고 국물 재료로 사용) 배는 껍질을 깎지 않고 씨만 제거해 편 썬다. 생강은 껍질을 벗긴 후 편 썰고, 마늘은 꼭지를 제거한 후 편 썬다. 육수망이나 면보에 생강, 마늘, 고추 씨 등을 넣는다. 무 절인 물은 체로 걸러 낸 후 생수, 소금을 넣여 간을 맞춘다.(동치미 육수) 절인 무에 배와 삭힌 고추를 넣고 향신채 주머니를 올린다. 동치미 육수를 붓는다. 재료들이 뜨지 않도록 그릇 등을 넣어 눌러준 후 뚜껑을 닫는다. 시원한 곳에서 일주일 정도 숙성한다.(기포가 올라오면 숙성이 잘 된 것)
동치미는 김치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얼어도 괜찮은 음식이었다.
겨울이 깊어지면 항아리 위에 얼음이 얇게 앉았고, 이는 실패의 신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얼었다 녹는 과정을 거치며 국물은 더 맑아지고, 신맛은 눌리며, 시원함은 또렷해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동치미 항아리는 일부러 바람이 드는 곳에 두거나, 땅에 더 깊이 묻히기도 했다.
동치미는 추위를 견디며 완성되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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