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의 고기에서 국민 주식으로, 돼지고기 미식 가이드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1-24 11:39:18
[Cook&Chef = 이경엽 기자] 한국인의 소울 푸드, 삼겹살.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풍경이다. 하지만 11월 21일 한식콘서트 연단에 선 최정락 셰프는 “우리가 돼지고기를 이토록 사랑하게 된 역사는 생각보다 매우 짧다”는 충격적인 사실로 강연을 시작했다. ‘돼지고기 파트’ 강연에서는 천대받던 식재료에서 국민 주식이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과, 소비자가 맹신하고 있는 등급과 품종의 허와 실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똥돼지’의 오명 벗고 식탁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최 셰프가 제시한 1887년 런던 화보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 속 삽화는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영국군 장교 옆에 그려진 조선의 돼지는 마치 강아지처럼 작고 왜소했다. 조선시대 재래종 돼지는 2년을 키워도 체중이 37kg에 불과할 만큼 경제성이 낮았다. 게다가 당시 돼지는 인분과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자라 기생충 감염의 온상이었다.
“돼지고기는 풍을 일으키고 잘해야 본전”이라는 옛말은 기생충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돼지고기는 바싹 익혀 먹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이유다.
이러한 인식이 바뀐 것은 1970년대 양돈 산업의 부흥과 함께다. 최 셰프는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이 맞물리며 국민 단백질 공급원으로 돼지고기가 적극 권장되었고, 프로판 가스와 휴대용 버너(부르스타)의 보급이 식탁 위 구이 문화를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70년대 말 등장한 삼겹살은 80년대 냉동 로스구이, 90년대 솥뚜껑 생삼겹살, 2000년대 숙성 통삼겹살로 진화하며 한국 외식 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했다. 기생충 걱정 없는 사료 급여와 위생적인 사육 환경 덕분에 이제는 덜 익혀 먹어도 안전한 시대가 되었지만,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우리의 조리 습관을 지배하고 있다.
‘한돈’은 우리 품종? YLD의 비밀
우리는 국산 돼지고기를 ‘한돈’이라 부르며 애용하지만, 최정락 셰프는 “한돈은 우리 고유 품종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한우가 우리 고유의 유전자를 가진 것과 달리,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의 95% 이상은 외래종의 교잡종인 ‘YLD’다. 새끼를 잘 낳고 젖을 잘 먹이는 요크셔(Y)와 랜드레이스(L)를 교배해 엄마 돼지를 만들고, 여기에 육질이 좋고 성장이 빠른 두록(D) 수컷을 교배해 생산한 ‘3원 교잡종’이 바로 우리 식탁에 오르는 돼지다.
최근 유행하는 ‘제주 흑돼지’나 ‘버크셔’, ‘이베리코’ 등은 이 YLD 시스템에서 벗어난 품종들이다. 하지만 최 셰프는 “특수 품종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흑돼지나 버크셔가 일반 백색 돼지보다 육색이 짙고 풍미가 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일반 소비자가 그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식당 창업을 준비한다면 구하기 힘든 1~5%의 특수 품종에 목매기보다, 95%를 차지하는 일반 돼지(YLD) 중에서 품질 관리가 잘된 고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강조했다.
1+ 등급의 배신, 그리고 ‘돈마호크’의 실체
소비자들이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등급제’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졌다. 소고기와 달리 돼지고기 등급은 소비자의 맛 기준이 아닌, 유통업자와 생산자를 위한 ‘규격 기준’에 가깝다. 돼지고기 1+ 등급은 도축 후 무게(지육 중량)와 등지방 두께가 특정 범위에 들어올 때 부여된다. 문제는 같은 1+ 등급 내에서도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이다.
최 셰프는 “무게는 많이 나가는데 등지방이 얇은 개체가 1+ 등급을 받으면, 구웠을 때 퍽퍽하고 맛없는 고기가 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지방이 너무 많아 등급이 떨어지더라도, 구이용으로는 훨씬 고소하고 맛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트에서 고기를 고를 때는 등급 표기보다는 고기의 육색이 선명하고, 지방이 희고 단단하며, 핏물(드립)이 흘러나오지 않은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SNS를 달구고 있는 ‘돈마호크’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뼈 등심을 통째로 정형해 도끼 모양을 낸 돈마호크는 시각적 만족감은 크지만, 본질은 지방이 적은 등심 부위다. “원래 돈가스나 탕수육으로 쓰던 부위를 뼈만 붙여 구이용으로 비싸게 파는 격”이라며, “일반 돼지로 만든 돈마호크는 구워 먹으면 퍽퍽해서 맛이 없다. 정말 맛있는 돈마호크를 즐기려면 지방 침착이 잘된 특수 품종이나 흑돼지를 골라야 한다”고 팁을 전했다.
맛있는 지방, 맛없는 지방
최정락 셰프는 ‘지방 예찬론’을 펼치기도 했다. 한국인은 삼겹살을 좋아하면서도 건강을 우려해 지방을 떼어내고 먹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에 대해 최 셰프는 “돼지고기의 진짜 맛은 지방, 그중에서도 껍질 바로 밑에 있는 ‘피하 지방’에 있다”고 강조했다. 근육 사이에 있는 흐물흐물한 근간 지방과 달리, 단단하고 쫀득한 피하 지방은 고소한 풍미의 핵심이다. 그는 “제주도 오겹살이 맛있는 이유는 껍질과 피하 지방을 제거하지 않고 탕박(뜨거운 물로 털을 뽑는 방식) 처리를 했기 때문”이라며, 좋은 지방을 적절히 섭취하는 것이 오히려 영양 균형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강연 말미, 최 셰프는 삼겹살과 목살에 국한된 소비 패턴에서 벗어나 다양한 부위를 경험해 볼 것을 권했다. 머리 쪽의 ‘두항정’, 목덜미의 ‘꼬들살’, 볼살 등 특수 부위들이 최근 뒷고기 전문점을 통해 재조명받는 현상은 긍정적인 신호다. “고기는 위치에 따라 맛이 다르다. 같은 삼겹살이라도 갈비뼈가 붙어 있던 중간 부위가 가장 맛있고, 오돌뼈가 정중앙에 박힌 것이 최상품”이라는 그의 조언은 당장 오늘 저녁 회식 자리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실전 지식이었다.
이번 강연은 돼지고기가 단순한 서민 음식을 넘어, 품종과 부위를 골라 즐기는 미식의 영역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주었다. ‘더럽고 냄새나는 동물’에서 ‘트렌디한 미식 식재료’로 변모한 돼지. 그 뒤에는 생산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 맛있는 한 점을 찾기 위한 한국인의 유별난 고기 사랑이 있었다. 최정락 셰프가 안내한 돼지고기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더 맛있어지는, 흥미진진한 탐구의 영역이었다.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