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뿌리에서 미식의 정점까지, 셰프가 말하는 소고기의 인문학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1-24 11:39:38

최정락 셰프가 전하는 한우의 역사, 등급의 진실, 그리고 맛있는 구이의 과학 소 등심  사진 = 최정락 셰프

[Cook&Chef = 이경엽 기자] 지난 11월 21일 서울 종로구 한식문화공간 이음에서 열린 ‘11월 한식콘서트’의 마지막 무대는 고기 굽는 냄새가 아닌, 깊이 있는 인문학적 통찰로 채워졌다.

‘숙성 고기의 대가’로 불리는 최정락 셰프(신사약방 오너 셰프)는 이날 ‘셰프의 고기(肉)수업’이라는 주제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식재료인 소고기의 역사적 변천사와 맛의 과학을 청중들에게 풀어냈다.

단순한 조리법 강의를 넘어, 한우라는 품종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현대 외식 트렌드의 변화를 꿰뚫는 그의 강연은 한식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일소에서 고기소로, 불고기의 궤적을 좇

최정락 셰프는 강연의 서두를 한우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열었다. 우리가 흔히 즐기는 한우가 지금과 같은 ‘미식의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과거 한우는 농경 사회의 핵심 동력인 ‘일소(역용종)’였다. 1970년대 이후 경제 성장과 함께 육류 소비가 늘어나고, 90년대 들어 육종 개량이 본격화되면서 비로소 부드러운 육질을 가진 ‘고기소(육용종)’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최 셰프는 “한우 갈비는 명절이나 생신상에 오르는 귀한 식재료였지만, 사실 우리가 대중적인 식당에서 접하는 소갈비의 90% 이상은 수입산, 특히 미국산이 차지하고 있다”며 한식과 수입 육류의 기묘한 공존을 지적했다.

그는 한식 고기 문화의 뿌리를 고구려의 ‘맥적(貊炙)’에서 찾았다. 미리 양념한 고기를 꼬치에 꿰어 굽던 맥적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눈 오는 밤에 고기를 구워 먹는 ‘설야멱(雪夜覓)’이라는 낭만적인 풍습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고기를 얇게 저며 양념에 재우는 ‘너비아니’로 발전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불고기’라는 용어는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불에 익혀 먹는 고기’라는 직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과 일본의 식문화 유사성이다. 최 셰프는 “전 세계에서 테이블 위에 화로를 놓고 즉석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문화를 가진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야키니쿠(燒肉)’ 역시 한국의 불고기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으로, 두 나라 모두 직화 구이에 적합한 부드러운 고기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근내지방(마블링)을 중시하는 독특한 소고기 등급제로 이어졌다. 한국과 일본이 미국이나 유럽보다 훨씬 세분화되고 높은 수준의 마블링 중심 등급제를 운용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구이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최정락 셰프  사진 = 이경엽 기자

마블링의 신화와 맛의 진실, 무엇이 좋은 고기인가

강연의 하이라이트는 소비자들이 가진 ‘좋은 고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대목이었다. 한국의 소고기 등급제는 마블링, 즉 지방 함량에 따라 1++(투플러스)부터 3등급까지 나뉜다. 최 셰프는 “요즘 소비자들이 ‘맛있다’라고 느끼는 기준은 ‘부드러움’에 편중되어 있다”고 꼬집었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식감을 최고로 치다 보니, 지방이 많아 부드럽지만 자칫 싱거울 수 있는 고기조차 최고급으로 대우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의 사례를 들며 시각을 넓힐 것을 주문했다. “유럽에서 주로 먹는 스테이크용 소고기는 우리 기준으로 보면 3등급에 해당한다. 마블링이 거의 없는 붉은 살코기지만, 그들은 두툼하게 썰어 ‘블루 레어’ 상태로 즐기며 고기 본연의 풍미를 만끽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붉은기가 비치면 “덜 익었다”며 거부감을 표하는 경우가 많아, 바싹 익혀도 부드러운 기름진 고기를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부위별 조리법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안심 국거리’ 일화는 청중의 탄식을 자아냈다. 가장 비싸고 부드러운 부위인 안심으로 국을 끓이면 최악의 맛이 난다는 것이다. 최 셰프는 “안심은 결합조직이 없고 근섬유가 가늘어 오래 끓이면 수분이 다 빠져나가 퍽퍽해지고 국물 맛도 우러나지 않는다”며, “국물 요리에는 운동량이 많아 결합조직이 풍부한 양지나 사태를 써야 깊은 감칠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이는 비싼 등급이나 부위가 무조건 만능은 아니며, 용도에 맞는 부위 선택이 미식의 첫걸음임을 시사한다.

소고기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중장년층의 푸념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범인은 바로 ‘진공 포장’이다. 과거 정육점에서 공기에 노출된 고기를 바로 썰어 팔던 시절과 달리, 현대의 진공 포장은 고기에 압력을 가해 육즙을 짜내고 근섬유를 위축시킨다. 포장지 내에서 혐기성 미생물이 증식하며 숙성이 아닌 부패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최 셰프는 “편리함이 맛을 일부 앗아간 셈”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트렌드의 변화, 오마카세에서 가성비로

최정락 셰프는 외식업계의 최전선에서 목격한 소고기 소비 트렌드의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유동성 자금이 풀리며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한우 오마카세’ 열풍은 엔데믹과 경기 침체를 맞으며 사그라들고 있다. 회식 문화의 축소, 택시비 인상 등으로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술자리가 사라지면서, 이제는 ‘가성비’와 ‘실속’이 키워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화려한 마블링의 로스구이 대신, 다시금 ‘양념육’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저가 한우 브랜드들이 돼지갈비 메뉴를 강화하거나, 차돌박이를 육회로 즐기는 등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차돌박이 육회’는 전라도 지역의 식문화가 유튜브와 SNS를 타고 서울로 역수입된 사례로, 기름진 고소함과 쫄깃한 식감을 동시에 추구하는 젊은 층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최 셰프는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기본과 본질”이라며, “미국산 LA갈비가 ‘LA 롱비치항’에서 선적되어 이름 붙여진 유래처럼, 수입육도 한식 양념과 결합해 우리만의 식문화로 정착했다. 앞으로는 품종과 산지를 넘어 부위를 더욱 세분화하고, 고기 본연의 맛을 살리는 다양한 조리법이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날 강연은 한우가 걸어온 길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변화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최정락 셰프의 말처럼 좋은 고기는 등급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입맛에 맞고 내가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그 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고기 한 점에 담긴 역사와 과학을 이해하고 먹는다면, 그 맛은 분명 이전보다 훨씬 깊고 풍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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