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이어온 에반게리온 UCC 자판기 커피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2026-08-17 16:56:48

안노 감독의 '리얼리즘'으로 시작한 의리
1,200만 캔 완판한 IP 콜라보의 교과서

[Cook&Chef = 이승우 기자]

어렸을 적 동네 비디오방 구석에서 아버지가 알음알음 구해오신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내게 거대한 생체 병기와 세기말적 분위기, 그리고 낯선 도쿄의 풍경 정도로만 기억되었다.

시간이 흘러 스무 살이 되어 다시 마주한 '에반게리온'은 어릴 적 보았던 단순한 로봇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침체되어 있던 일본 오타쿠 문화를 단숨에 양지로 끌어올려 폭발시킨 거대한 '르네상스'이자 바이블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디자인, 메카닉의 디테일, 철학적인 대사 등 모든 것이 신드롬이 되었다. 나 역시 으레 그렇듯 뒤늦게 그 치명적인 세계관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이후 일본에 거주하게 되면서 에반게리온과 관련된 다양한 굿즈를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다.

오타쿠의 일상에 침투한 우연한 PPL, 'UCC 밀크 커피'

하지만 마음껏 덕질을 하기엔 늘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은 법이다. 주머니 가벼운 에반게리온 덕후들의 수집욕을 강렬하게 자극하면서도, 동네 자판기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아이템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달콤하고 텁텁한 맛의 일본 국민 캔커피 'UCC 밀크 커피'였다.

왜 하필 이 평범한 캔커피가 애니메이션 굿즈의 전설, 이른바 '에바 캔(エヴァ缶)'으로 불리며 20년 넘게 오타쿠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 것일까?

그 시작은 치밀하게 계산된 상업적 기획이 아니었다. 에반게리온의 창조자인 안노 히데아키 감독 특유의 '리얼리즘 집착'에서 비롯된 우연이었다. 그는 극 중 배경인 가상의 도시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인물들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소품으로 실존 브랜드를 그대로 그려 넣었다. NERV(네르프) 본부 자판기에서 주인공들이 무심코 뽑아 마시던 커피가 바로 실제 UCC 밀크 커피의 3색 캔 디자인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다.

캔 뚜껑을 지키기 위한 오타쿠들의 기상천외한 '광기'

TV판 애니메이션이 일본 열도를 뒤흔들자, UCC 커피 본사 측은 1997년 극장판(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개봉에 맞춰 제작사에 정식 콜라보레이션을 제안한다. 작중 캐릭터들의 일러스트를 그려 넣은 한정판 'UCC 에바 캔'이 현실 세계에 공식 출시된 것이다.

결과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평소 캔커피를 마시지 않던 젊은 오타쿠들이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 캔을 소장하기 위해 낱개가 아닌 '상자(Box)' 단위로 커피를 사재기했다. 첫 출시 당시 에바 캔은 무려 40만 케이스(약 1,200만 캔)가 팔려나가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무엇보다 외식 업계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오타쿠들의 기상천외한 소비 방식이었다. 이들은 에바 캔을 '음료'가 아닌 '전시품'으로 대했다. 캔 마개를 따면 외관이 훼손된다는 이유로, 송곳을 가져와 캔 밑바닥에 작은 구멍을 두 개 뚫어 내용물(커피)만 빼내어 버리고 빈 캔을 장식장에 고이 모셔두는 전무후무한 수집 문화를 만들어냈다. "구매력을 갖춘 성인 팬덤이 F&B 시장의 룰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0년을 함께 늙어간 기업과 팬덤의 '성스러운 의식'

에바 캔이 F&B 역사에 위대한 클래식으로 남은 진짜 이유는 단발성 유행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1997년의 첫 대박 이후, 2007년부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가 개봉하며 기나긴 여정을 이어갈 때마다 UCC 커피는 어김없이 새로운 디자인의 에바 캔을 출시했다.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품의 명맥을 함께하며 공식 파트너로서의 '의리'를 지킨 것이다.

과거 비디오방에서, 그리고 심야 TV 앞에서 에반게리온에 열광했던 소년들은 이제 기성세대가 되었다. 하지만 신작이 개봉할 때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 자판기에서 UCC 에바 캔을 뽑아 마시는 것은, 이들에게 2D 세계관의 숨결을 현실의 미각으로 느끼는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뒤늦게 시작된 나의 에반게리온 사랑 역시, 종종 방문하는 도쿄의 어느 자판기 앞에서 20년의 세월을 품은 캔커피를 들이켜는 것으로 약소하게나마 이어지고 있다. 평범한 커피 한 캔에 세계관을 불어넣고 팬덤과 함께 나이 들어가며 전설이 된 UCC 커피. 이는 '보는 문화'와 '먹는 문화'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입체적인 사례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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