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탐구] 아삭함 너머 500년의 반전: 선조들은 왜 오이에 고기를 채웠을까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 2026-07-28 15:00:16
[Cook&Chef = 서진영 기자]오이를 한입 베어 물면 신선한 청량감이 입안 가득 번진다. 단단한 과육이 아삭하게, 풍부한 수분은 무더위에 지친 입맛을 깨운다. 냉국과 생채, 오이소박이, 오이지처럼 여름 밥상에 빠지지 않는 이유도 이 청량한 맛에 있다.
오늘날 오이는 흔한 여름 채소지만, 우리 선조들은 오이를 생으로만 먹지 않았다. 소금물에 담가 계절을 저장했고, 장과 기름을 더해 볶았으며, 삶은 꿩고기와 함께 침채를 만들었다. 왕실에서는 쇠고기와 표고버섯, 달걀지단을 정갈하게 끼운 오이선으로 차렸다. 오이는 민가의 장독과 궁중의 잔칫상을 오가며 한식의 저장법과 조리법을 함께 품은 식재료였다.
오이는 약 95%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량은 약 15kcal 안팎이며, 칼륨과 비타민 C, 비타민 K, 소량의 식이섬유도 들어 있다.
한자로 황과(黃瓜) 또는 호과(胡瓜)라고도 썼다. 익으면 누렇게 변하는 열매의 색에서 황과라는 이름이 나왔고, 외부에서 들어온 박과 식물이라는 의미에서 호과라는 이름도 사용됐다. 푸른 상태에서 먹는 오늘날의 오이와 달리 씨를 받거나 오래 두면 껍질이 누렇게 익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선조들은 수분이 많아 쉽게 무르는 오이를 소금과 장, 식초를 이용해 저장했다. 수확기가 짧은 채소를 오래 먹으려면 수분을 빼고 부패를 늦춰야 했다. 오이는 소금에 절이면 조직이 단단해지고 풋내가 줄어들며, 생오이와는 다른 깊은 맛을 낸다. 여름에 담근 오이지는 장마와 무더위를 지나 가을과 겨울 반찬으로도 쓰였다.
조선 전기의 고조리서 『수운잡방』에는 오이를 이용한 여러 저장법이 기록돼 있다. 『수운잡방』은 16세기 경북 안동 지역의 조리와 양조법을 담은 책으로, 당시 사대부가에서 먹었던 음식과 저장법을 살펴볼 수 있는 고문헌이다.
소금물에 오이를 담근 물오이저, 어린 오이와 늙은 오이를 구분해 담근 오이저와 늙은오이저가 나온다. 오이에 소금과 물을 더해 발효시키기도 했고, 장을 이용해 오이즙저를 만들기도 했다. 간장에 큰 오이를 담근 향과저도 기록돼 있다. 같은 오이라도 크기와 숙성 정도에 따라 저장법을 달리한 것이다. 조선 전기 김치 분류에서도 『수운잡방』의 물오이저, 오이저, 늙은오이저, 오이즙저, 향과저를
조선 전기에도 오이김치와 오이지, 장아찌의 원형에 해당하는 조리법이 함께 존재했다. 고춧가루가 널리 쓰이기 전이므로 소금과 장, 식초, 생강, 마늘, 산초와 같은 재료로 맛을 냈다. 붉은 양념보다 발효된 오이 자체의 신맛과 짠맛, 향신료의 향이 중심이 된 음식이었다.
17세기 장계향이 쓴 『음식디미방』에는 오이지를 삶은 꿩과 함께 조리한 생치침채법과 생치지히가 기록돼 있다.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쓰인 조리서로, 조선 중기 양반가의 조리법과 식재료 활용도가 담겨 있다.
생치침채법은 삶은 꿩고기와 오이지를 이용한 침채다. 간이 든 오이지를 물에 우려 지나친 짠맛을 뺀 뒤 껍질과 속을 손질하고, 삶은 꿩고기와 함께 썰어 소금물에 담가 익혔다. 채소만 담그는 오늘날의 오이김치와 달리 육류를 침채에 함께 사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조선 전기 발효식품 자료에서도 생치침채법의 재료를 삶은 꿩과 오이지, 끓여 식힌 소금물을 부어 담궜다.
생치지히는 오이지와 꿩고기를 간장과 기름으로 조리한 음식이다. 오이지를 물에 우려 짠맛을 조절한 뒤 삶은 꿩고기와 함께 썰어 간장과 기름을 넣고 볶았다. 오늘날에는 오이를 날로 먹거나 차게 무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에는 절인 오이를 다시 익혀 따뜻한 반찬으로 만들었다.
생치짠지히에는 오이지와 꿩고기에 천초와 기름, 후추를 더해 고기 냄새를 줄이고 입안에 알싸한 향을 남긴다. 오이지의 산미와 염분이 꿩고기의 담백한 맛을 받치고, 천초와 후추가 향을 입한다.
꿩은 조선시대에 국과 탕, 만두소, 구이, 침채 등에 두루 쓰인 식재료였다. 닭보다 야생성이 강하고 살이 단단하며 맛이 담백해 귀한 음식이였다. 오이지와 꿩의 결합은 저장 채소와 육류를 한 그릇에 담아 맛과 영양을 보완한 조리법이었다.
오이지는 오이와 ‘지’가 합쳐진 말이다. ‘지’는 채소를 소금이나 장에 절여 저장한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짠지, 장아찌와 같은 저장 음식의 이름에도 남아 있다. 침채(沈菜) 역시 채소를 소금물 등에 담가 익히는 음식을 뜻한다.
전통적인 오이지는 오이에 뜨거운 소금물을 붓거나 진한 소금물에 눌러 담가 만들었다. 오이가 소금물 위로 떠오르면 공기에 닿은 부분부터 물러질 수 있으므로 돌이나 무거운 덮개를 올려 눌렀다. 이렇게 담근 오이지는 먹을 만큼 꺼내 물에 우려 짠맛을 줄이고, 얇게 썰어 물기를 꼭 짠 뒤 참기름과 깨소금에 무쳤다. 찬물에 띄우거나 냉국으로 먹기도 했다.
『음식디미방』에서 오이지를 물에 우려 조리한 것도 같은 이유다. 저장을 위해 강하게 넣은 소금기를 그대로 먹지 않고, 조리 전에 물에 담가 필요한 만큼 염도를 낮췄다. 저장 단계와 조리 단계를 분리한 것이다. 오늘날 오이지를 무치기 전 물에 담가 두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가에서 오이를 소금물에 담가 오이지로 먹었다면, 궁중에서는 오이의 색과 형태를 살린 정갈한 찬으로 다듬었다. 대표적인 궁중음식이 오이선이다.
오이선은 오이를 일정한 길이로 잘라 칼집을 넣고 소금에 절인 뒤, 쇠고기와 표고버섯, 황백지단을 색색으로 끼워 만든다. 여기에 식초와 설탕, 소금으로 맞춘 초간을 끼얹어 새콤하고 산뜻하게 먹는다. 푸른 오이 사이에 갈색 쇠고기와 표고, 노란색과 흰색 지단을 번갈아 넣어 맛뿐 아니라 색의 조화도 중요하게 다뤘다.
오이소박이는 오이에 칼집을 넣고 부추와 파, 마늘, 고춧가루 등의 소를 채워 익힌 음식이다. 오이 속에 재료를 넣는 구조는 오이선과 닮았지만 맛과 성격은 다르다. 오이선이 익힌 쇠고기와 버섯, 지단을 넣어 바로 먹는 궁중 찬이라면, 오이소박이는 채소 양념을 넣어 발효시킨 김치다.
고춧가루가 널리 사용되기 전의 오이김치는 소금물과 장, 식초, 생강, 산초 등의 맛이 중심이었다. 이후 고추와 젓갈이 김치에 널리 쓰이면서 오늘날과 같은 붉은 오이소박이가 발달했다. 오이는 속을 채워도 형태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소금에 절인 뒤에도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다.
오이냉국은 오이를 채 썰어 식초와 소금으로 간한 찬 국물에 넣은 음식이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미역이나 가지, 양파, 깨를 더한다. 불을 오래 사용하지 않고 만들 수 있으며, 새콤한 국물과 오이의 수분감이 더해져 여름철에 즐겨 먹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오이는 백다다기오이와 취청오이, 가시오이 등으로, 백다다기오이는 껍질색이 비교적 연하고 단단해 오이소박이나 오이지, 무침에 사용된다. 취청오이는 길고 짙은 녹색을 띠며 과육이 부드러워 생채와 냉국에 잘 어울리고, 가시오이는 표면의 가시가 뚜렷하고 향과 식감이 강한 편이다.
지속되는 무더위 속, 제철 오이 한입의 청량함으로 선조들이 남긴 지혜와 함께 올여름을 이겨내 보자Cook&Chef /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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