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남도의 얼얼한 향이 서울로 올라왔다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2-23 09:07:33

제피(초피, Zanthoxylum piperitum), 지역 향신료가 ‘후추 이후’ 한식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유 [서진=오페퍼 홈페이지https://www.opepper.kr/171/?idx=176 / 제피]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서울의 한식 파인다이닝과 로컬 식재료 시장에서 ‘후추 같은데 후추가 아닌 향’이 자주 호출된다. 첫 향은 레몬 껍질처럼 청량하고, 이어 혀끝이 순간적으로 얼얼해지는 감각이 남는다. 남도에서 오래 써온 제피(초피)다. 한때는 추어탕의 곁향신료 정도로 소비되던 제피가 최근에는 한식의 향신 구조를 재설계하는 재료로 주목받는다. 이 흐름을 이해하려면, 제피가 어디서 어떻게 쓰여 왔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제피/초피/산초’는 같은가
제피는 감귤과(Rutaceae) 산초속(Zanthoxylum)의 식물로, 국내에서 식용·향신료로 널리 쓰이는 종 가운데 하나가 Zanthoxylum piperitum이다.

지역과 문맥에 따라 ‘초피(제피)’, ‘산초’가 혼용되기도 하지만, 산초로 유통되는 재료가 다른 종(예: Zanthoxylum schinifolium)인 경우도 있어 현장에서는 “어느 종의 열매/잎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피 향은 무엇으로 설명되는가
사용자께서 언급한 “강한 향”은 실제로 정유(essential oil) 성분과 ‘얼얼함’을 내는 알킬아마이드 계열이 결합해 만들어진다.

향(향기) 성분: 리모넨(limonene), 시트로넬랄(citronellal), 제라닐 아세테이트(geranyl acetate) 등이 주요 휘발성 성분으로 반복 확인된다. 일본산 산쇼(Z. piperitum) 시료를 GC/MS로 분석한 연구에서 리모넨, β-펠란드렌(β-phellandrene), 시트로넬랄, 제라닐 아세테이트가 주요 성분으로 보고된다.
한국 학술자료(2005년)에서도 Z. piperitum의 휘발성 성분으로 리모넨이 가장 우세하고, 제라닐 아세테이트·시트로넬랄 등이 뒤를 잇는 것으로 보고된다.

성분 비율까지 포함한 비교적 공신력 있는 안전성 보고서에서도 과실 오일의 주요 성분으로 D-리모넨, 제라니올(geraniol), 시트로넬랄, 제라닐 아세테이트 등이 제시된다. ‘얼얼함’(tingling/numbing) 성분: sanshool(산쇼올) 계열 알킬아마이드가 혀의 감각 수용체에 작용해 특유의 저림을 만든다.

즉 “제피가 시트러스처럼 상큼하다”는 표현은 감각적 비유가 아니라, 리모넨·시트로넬랄 등 모노테르펜 중심의 정유 조성이 실제로 그 방향의 향을 만든다는 점에서 근거가 있다.

[사진=오페퍼홈페이지]

지역 음식에서 제피가 어떻게 쓰였나
제피는 한국 전통에서 특히 남부권(남해안·전라/경남) 식문화와 강하게 연결된다. 가장 전형적인 사용처는 ‘물고기·민물 생선·기름진 탕’이다.

추어탕(미꾸라지탕): 남부권에서 추어탕에 초피가루를 곁들이는 풍습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흙내·비린 향을 정리하는 용도로 설명된다.
매운탕/생선탕, 회: 남부 한식에서 말린 제피 열매를 빻아 양념으로 곁들이는 예가 정리돼 있다(추어탕, 매운탕, 회 등).
제피순(어린잎) 나물·장아찌·부침·튀각/부각: 열매만이 아니라 잎도 ‘향채’로 소비됐다. 제피순을 나물로 먹거나 장아찌로 담그고, 부침개·튀김 형태로도 확장된다.
젓·어간장류의 허브화: 제피 잎을 멸치+소금 혼합물에 더해 향을 입힌 ‘허브형 어간장(초피액젓)’ 사례도 알려져 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제피는 “후추 같은 가루 향신료”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남도에서는 잎-열매-가공(장아찌/젓/부각)까지 이어지는 ‘식재료 체계’로 자리했다. 지역 식문화가 재료를 단품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길들였다는 뜻이다.

왜 하필 남도에서 제피가 ‘생활 향신료’가 되었나
제피의 지역성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식생활 구조와 맞물려 형성됐다.

수산물 중심 식단에서 필요한 ‘탈취-정리’ 기능
남해안과 하천·늪지가 가까운 남부권 식생활은 어패류·민물고기 탕 문화가 강하다. 이때 제피의 정유 향은 비린내를 덮는 방식이 아니라, 향의 방향을 위로 끌어올려 국물의 무게를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추어탕에 초피를 곁들이는 관행이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저장·위생 기술이 제한된 시대의 ‘항균’ 기대
전통 의서에서는 초피를 따뜻한 성질로 설명하고, 생선의 독을 없애거나 벌레를 죽인다는 식의 기록이 전한다는 정리도 있다. 또한 현대 연구 맥락에서 항균/항염 가능성이 언급되며, 식품 위생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글도 있다. 다만 여기서 기사 윤리상 주의할 점이 있다. ‘항균’은 실험 조건·추출물 농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므로, 상업적 문구처럼 단정하기보다 “전통적으로 그렇게 기대되어 왔고, 현대 연구에서도 가능성이 탐색된다” 수준의 서술이 안전하다.

자생/유통의 지리
초피(제피)가 한반도 남부 및 동해 연안에 자생한다는 지리적 설명이 제시된다. 지역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향신 식물이었기에 ‘생활 향신료’로 정착할 토양이 있었다.

고조리서·전통 기록 속 ‘초피/산초’의 위치
고조리서와 생활서에서는 초피/산초가 향신·약용의 경계에서 다뤄졌다. 현대 독자가 기대하는 “레시피에 정확히 제피가루 몇 g” 같은 형태는 아니더라도, 향신 식물로서의 위치는 꾸준히 확인된다. 예를 들어 전통 의서(동의보감/본초강목 등)에 ‘촉초/천초’로 기록된다는 정리와, 따뜻한 성질·복부 냉기·생선 독 등의 서술이 소개된다.

이 대목은 기사에서 ‘지역 음식의 관행’이 단순 민간 취향이 아니라, 당시 지식 체계(의서/본초학)의 언어로도 설명되었음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영양학·감각과학 관점: “향”은 곧 조리 기능이다
제피의 가치는 “향이 독특하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감각과학적으로는 다음이 핵심이다.

휘발성 정유(리모넨·시트로넬랄·제라닐 아세테이트 등)가 먼저 코로 들어가고, sanshool 계열이 혀의 촉각/통각 채널을 건드리며 ‘얼얼함’을 만든다.
이 조합은 기름진 탕·구이에서 “느끼함을 잘라낸다”는 체감으로 번역된다. 실제로 남부권이 장어·추어탕·생선탕에서 제피를 자주 쓰는 이유를 감각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조리 포인트도 비교적 명확하다. 정유는 가열 시간이 길수록 날아가기 쉬우므로, 제피가루는 오래 끓이는 단계보다 마무리 단계에 쓰는 것이 향을 살린다. 이 원리는 제피를 ‘후추 대체’로 쓰려는 셰프들의 실무 감각과도 맞닿아 있다(후추처럼 초반에 넣어 끓여버리면 개성이 빠진다).

‘지금’ 제피가 각광받는 이유
제피의 부상은 단순 재료 유행이 아니라, 한식의 프레임 변화와 연결된다.

후추 중심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
한식의 고기·생선 요리에서 후추는 거의 자동값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식의 향은 반드시 서구 향신료를 기본값으로 둬야 하나”라는 질문이 늘었다. 제피는 토종 향신료이면서도 ‘후추처럼 쓰되 후추와 다른 방향의 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대안이 된다. (이 문장은 가치 판단이 아니라, 미식 현장의 기능적 선택을 요약한 것이다.)

로컬리티(terroir) 브랜딩의 확산
남도 자생/채취, 계절성, 소량 생산은 곧 스토리 자산이다. 서울에서 보기 어려웠던 지역 재료가 “지역성”이라는 이름으로 프리미엄 재료가 되는 순간, 제피는 가장 설명력이 좋은 사례가 된다.
‘강한 향을 중화’가 아니라 ‘세련되게 제어’하는 기술
최근 상업적 접근은 제피의 강함을 지우기보다, 기름(버터·오일)과 결합해 확산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간다. 이는 정유 향신료를 다루는 현대 조리의 전형적 전략이며, 제피가 파인다이닝과 가공 상품(소금, 오일, 시즈닝)에서 동시에 확장되는 배경이다.

제피는 “서울에서 새롭게 발견된 식재료”가 아니라, 남도에서 이미 완성된 향의 문법이었다. 수산물 중심 식단이 요구한 탈취·정리 기능, 전통 지식 체계가 부여한 따뜻한 성질과 위생적 기대, 그리고 자생/유통의 지리가 결합해 제피를 지역 향신료로 정착시켰다. 이제 그 향은 ‘로컬리티’와 ‘후추 이후의 대안’이라는 현대 미식 언어로 번역되며 다시 중심 무대로 올라오고 있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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