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테이블] '호프' - 외계인이 쳐들어와도 밥부터 먹고 하자
조소현 기자
cnc02@hnf.or.kr | 2026-07-30 15:00:26
주먹밥, 손에 꼭 쥔 생존의 본능
[Cook&Chef = 조소현 기자] 나홍진의 세계관에서 인물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안 굶는다.
『황해』에서 구남(하정우)은 쫓기고 굶주린 상황에서 국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곡성』에서 효진(김환희)은 말 그대로 밥상머리 엎는(?) 악귀 들린 먹방을 선보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존재와 맞서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일단 먹고 보자’라는 원초적 본능은 나홍진표 먹방의 캐치프레이즈다.
이는 팝콘을 먹으며 스크린 너머의 ‘남의 일’을 구경하던 관객을 끌어들이는 장치이기도 하다. 허기와 식욕이 있는 ‘나’와 별다를 것 없이 지극히 평범한 인물을 비정상적인 상황에 몰아넣음으로써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이 느낄 공포와 절박함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된다.
영화 『호프』는 DMZ 인근의 작은 항구 마을 '호포항'을 배경으로 경찰 범석(황정민)과 사냥꾼 성기(조인성) 일행이 외계 괴물로 추정되는 기이한 존재에 의해 죽은 소의 사체를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SF 괴수 스릴러’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만든 『호프』에서도 먹방의 역할은 나름 중요하다.
조인성이 연기한 ‘성기’와 청년 무리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괴물’의 거대한 실체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다. 그들은 ‘괴물’을 추적하는 와중, 잠깐의 짬을 내 주먹밥과 총각김치를 먹는다. 언제 어디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숲에 적막이 흐르고, 그 사이를 쩝쩝거리며 밥 씹는 소리와 굵은 무를 우적우적 씹는 소리만이 가득 채운다. 저작음만으로 영화는 다가올 사투에 대비하는 긴장감과 결의를 고스란히 전해낸다.
주먹밥은 생각보다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밀접한 음식이다.
기원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주먹밥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에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과 병사들이 콩가루나 된장을 섞은 밥을 손으로 뭉쳐 휴대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있고, 행주대첩 중에는 여성 의병인 일명 '밥할머니'가 치마에 쌀과 주먹밥을 담아와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먹이며 사기를 북돋았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 위해 옥수수와 조, 소금만을 넣은 거친 형태의 주먹밥을 만들어 먹었다. 근현대사에서도 이어진 민족의 수난에서 주먹밥은 전쟁터의 전투식량이며, 피난길의 생존식량이자, 불합리함에 맞서는 저항과 연대의 음식이었다.
주먹밥처럼 밥을 뭉쳐 먹는 음식은 쌀이 주식인 아시아권 국가들에 흔하게 보인다. 그 중 우리가 생각하는 주먹밥은 찰기있는 쌀로 밥을 지어 먹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나타난다. 두 나라 모두 전투식량 혹은 피난길에 주먹밥을 먹었다. 그러나 일본의 것은 산을 형상화한 삼각형에 김을 겉에 붙인 '삼각김밥'이지만, 우리나라의 주먹밥은 모양을 낼 사치도 없다는 듯 손으로 둥글게 뭉친 투박한 구형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가장 쉽게 열량을 채울 수 있는 밥을 자극적인 양념에 버무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뭉친 밥. 입맛이 있건 없건 입에 욱여넣으라고 만든 주먹밥에는 다른 한식에서 찾기 힘든 ‘대충’의 미학이 있다. 밥에 진심인 한국인들이 제대로 식사할 시간조차 없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는 암시가 이 한 주먹의 음식에 담겨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성기는 외계인과 육탄전을 벌이고, 수차례 공중으로 내던져지면서도 끝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나홍진 감독이 성기라는 인물에 담아낸 것은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호프』가 사투를 앞두고 손에 쥔 음식으로 주먹밥에 총각김치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국 사람이라면 외계인이 처들어와도 일단 밥심부터 챙길 것이다. 『호프』가 말하는 외계인보다 더 강한 것은, 끝내 밥 한술 뜨고 다시 일어서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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